9卷3冊 : 四周單邊 半郭 22 x 17cm, 有界, 10行21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0 x 20 cm.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정간의 시문집이다. 증조할아버지는정원호(鄭元護)이고, 할아버지는 정세진(鄭世振)이며, 아버지는정사징(鄭思徵)인데, 정간의공적으로 인해 각각 사헌부집의, 좌승지,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증정부인 월성 이씨로 상의원별좌 이두병(李斗柄) 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 남양 홍씨로 홍처약(洪處約)의 딸이다. 슬하에후사(後嗣)가 없어 족제(族弟) 정요(鄭橈)의 아들 정주변(鄭周弁)으로 뒤를 이었으며, 사위는김치(金緻)․박사철 (朴思澈)․신근인(申近仁)․장윤혁(張胤赫)․이구상(李龜祥) 등이다. 11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그를 횡계(橫溪)에취학시켰다. 정간은 정만양과 정규양 문하에서 매산 정중기와 남창(南窓) 정제(鄭梯) 등과 함께열심히 경전의 깊은 뜻을 익혔다. 1715(숙종 41)년에 국자생원(國子生員)이 되고, 1725(영조 원)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괴원(隸槐院) 부정자 (副正字)가 되고, 1727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돌아와 3년 상을 치렀다. 1733(영조9)에 승문원박사로서 제원찰방(濟原察訪)에 나아가고, 이듬해에 성균관전적에 올랐으며, 좌랑(佐郞) 으로 함경도사(咸鏡都事)에 나아갔다. 1737년 병조정랑으로 청양현감(靑陽縣監)을 지내고, 1741년에영월부사(寧越府使)를 거쳐 선천부사(宣川府使)를 역임했다. 이어부윤을 거쳐 우부 승지와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정간은 청백리로서 고을을 다스림에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모두가 칭송했으며, 임금의 하사한 계문(癸文)에 이르기를 “옛 고향에 돌아오니 생각 전하기 를 힘씀으로 하여라. 맹세하기를 곧기는 얼음처럼 맑으며 잡음은 간략하고 베풀기를 넓게 하기를. 오고가는 맑은 바람은 여러 고을살이한 지방의 송덕비에 빛나도다”라 하였다.영천 시 과전동의 창대서원(昌臺書院)에서 제향하고있으며, 영천시 녹전동에 북계영당(北溪影堂)이 있다.
이 문집은 1844(헌종 10)년에 편집, 간행하였다. 문집 가운데 시는 여행 또는 서경시가 많다. 「유묘향산(遊妙香山)」을 비롯하여 「등안흥제승루(登安興制勝樓)」․「제구강팔경도(題鷗 江八景圖)」 등은 수준 높은 작품이며, 「상도이수(霜桃二首)」 등의 영물시도 저자의 시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대수(大水)」와「대우(大雨)」는1736(영조 12)년과 1747년의대홍수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소(疏)의 「사지평소(辭持平疏)」는 사직을 청원하며 자신의 소회(所懷)를 진언한 상소문으로, 종묘(宗廟)의 축식(祝式)과 치도(治道)의 비태(否泰), 군덕 (君德)의 득실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축식에 있어서는 간지(干支) 아래에 효증손사 왕신(孝曾孫嗣王臣), 국왕신(國王臣) 또는효증질손(孝曾姪孫) 등으로 명칭이 불일치함을 지적하고 이의시정을 건의하였다. 서(書)는당시의 명공석학(名公碩學)들과 왕복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는 경전(經典)에대한 훈고(訓誥)와 예론(禮論)에 관한 문답이 많다. 강의의 「전경강의(專經講義)」는 1755(영조 31)년 경연관으로서 백성 구제의 방책에 관한 하문에 대하여 그 대책을 밝힌 것이다. 상서(上書)의 「백관최복청거백피화착마구상서(百官衰服請去 白皮靴着麻屨上書)」는1757년 중궁과 대왕대비의 상을 당하여 백관이 최복을 입고 백화를 신은 것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이의 시정을 건의한 것인데, 이 건의가 채택되었음을 부기하고 있다.